치료용 아기


김형규
13시간 전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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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는 이런 것이 있는 줄 몰랐다.
'치료용 아기'라고 검색을 해보니
관련하여 여러 의견들이 많이 보였다.

불치병에 걸린 오빠를 치료하기 위해
적합한 조합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태어난 여동생

불치병으로 평생 아파할 오빠를 생각하면
오빠와 부모에겐 반가운 화색이 돌 희망적 뉴스지만

오빠에게 골수를 제공한 그 여동생은
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긴다.

그런데 이 일이 이사야서에 기록이 되어 있고
이 일이 즉흥적인 일이 아닌

하나님께서 아주 오래전에 계획하신 일이라셨다니....

그럼 누가 불치병에라도 걸렸단 말이니? 하고 물을 수 있겠다.

그리고 왜 이사야서에서 아기 예수를 묘사하기를
연한 순 같고 마른 땅의 뿌리 같이 볼 품 없고
흠모할 게 전혀 없다고 했을까

이게 바로 영혼의 불치병에 걸린 내 모습이라고 하셨다.
이런 나를 고치시려고 치료용 아기로
예수님이 이 모습을 하시고 오셨다셨다.

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친 것은
지독한 순종이 아니라

죽어도 하나님이 살리실 것을
믿었기 때문이라셨다.

그 말처럼 하나님은 칼을 빼어 든 손을 붙잡으셨고
모리아 산을 내려간 이삭은
더이상 옛날 이삭이 아닌
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의 이삭이었다.

그리고 이삭을 축복하셨다.
단지 그 후손이 번성할 것을 말하심이 아니라

그 이삭의 씨에서
죽을 죄인인 나를 치료하실 아기
예수님을 주시는 그 약속을
확증하시는 순간이었다.

나는 무엇을 기다릴까

성탄이라는 공기조차 다른 어떤 행복한 분위기
그 속에 예수님의 생일을 내 걸고
그런 분위기로 행복해질 나를 꿈꿀까

이 말씀을 들으니
예수님이 날 위해 그렇게 오셨다고
내 가슴에 말씀하시는 것 같다.

치료용 아기...

인도의 그 남매 이야기를 들을 때
나는 마음에 치료가 되었다니 잘 됐네 하고
환영하기가 그랬다...

치료를 위해 태어난 동생이라니....

그렇다면

날 살리시려고
자기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
치료용 아기 예수님은....ㅠㅠㅠㅠㅠㅠ

이 예수님 앞에서
내가 헛된 것들을 기다린다는 건
예수님을 보지 못한 까닭이며
내 앞에 오신 주님을
그 음성을 보고 듣는 눈과 귀가 없음이겠다.

이제 내가 주님을 기다린다면
나는 이렇게 오신 주님을
내 영혼의 눈을 열어 본 까닭이겠다.

예전에는 예수의 피로
내 죄를 씻어 주시고 구원해달라는 말을
당연하게 했었는데

이 말씀 앞에 서니
두렵고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.

책임있게 살아야한다는 대언하시는 말씀을
나는 지금 마주하고 있다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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